패션•유통업계의 큰 손 E사, 천원샵 시장을 넘보다
2003년 당시 40년 전통의 패션•유통 전문 기업 E사. 지금까지 쌓아온 자본력과 유통력을 기반으로 천원샵 시장에 진출한다. 당시 천원샵 시장 규모는 600억원 정도. 하지만 2009년 5000억원을 내다볼 만큼 그 시장의 성장 가능성 무한했다. 천원샵은 미국, 일본 등 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오히려 성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제품과 가격 대비 뛰어난 품질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소비자의 수준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E사는 2003년 출사표를 던졌다.

E사가 진입할 당시 천원샵 시장에 싸울만한 경쟁자는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다이소(Daiso) 하나였기 때문에 E사는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다이소를 이기기 위해 E사는 어떤 전략을 구사했을까? 우선 첫째, 구매력을 갖춘 신세대 여성 고객에게 어필했다. 기존 천원샵의 수퍼마켓식 진열 방식을 탈피해 테마별로 제품을 진열했다. 월 단위 테마를 정하고, 2주마다 소 테마를 변경하면서 새로운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가령 녹차가 주제인 달은 매장 분위기 연출은 물론이고 다기, 녹차 팩 등 녹차와 관련된 상품을 전면에 내세우는 식이다.

둘째, E사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자사 유통망이 그것. E사는 자사가 소유한 아울렛, 대형 할인 매장 안에 천원샵을 내는 샵 인 샵(shop in shop)으로 매장을 확보했다. 따로 로드샵 매장을 내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었다.

세련된 매장과 강력한 유통망으로 다이소에 도전장을 낸 E사, 결과는? 한마디로 기대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천원샵 성공의 핵심, 충동구매 성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천원샵에 꼭 무언가가 필요해서 찾아간다기 보다 지나가는 길에 들러 구경하다 구매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천원샵의 성공조건은 별 저항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가격, 오다가다 쉽게 들를 수 있는 가까운 지리적 위치,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 누구나 하나쯤은 필요한 물건이 있도록 각양각색의 제품 구색, 이 3가지다. E사는 이를 몰랐던 것이다.

2등 기업의 실수 1. 업에 대한 이해 보다는 자신의 강점에 대한 과신
E사의 전략은 어떠했나? 우선, 매장 차별화 전략으로 상품 구성력에 집중하지 못했다. 기존의 유통망을 활용하다 보니 타겟 고객과의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다. 후발 주자 E사, 이를 만회하기 위해 로드샵을 내고 더 나아가 계열사 편의점, 영화관에까지 샵인 샵 매장을 내고 있다. 하지만 E사 매장은 현재 90여개에 불과하다. 천원샵 절대 강자 다이소의 15%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제품 구성력에 있어서도 다이소와 큰 차이를 보인다. 다이소가 20여 개 카테고리, 2만여 종의 제품을 보유하고 매장 규모에 따라 제품을 배열하는 것과는 달리 E사는 고작 1000 여종의 제품에 불과하다.

엄청난 자본력과 기존 유통파워로 다이소에게 도전장을 낸 E사. 하지만 시장 점유율 65%를 차지하는 다이소를 넘지 못하고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천원샵 시장의 핵심에 대한 이해 없이 모기업의 자본력이나 유통력을 이용해 쉽게 시장을 장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E사와 같이 자신의 강점을 과신해 실패한 기업, 또 있을까? 2005년 온라인 교육 시장 최강자인 메가스터디에 도전장을 낸 S사다. S사는 국내 굴지의 이동통신사로 앞선 온라인 기술 및 경험을 앞세워 온라인 교육 시장에 뛰어들었다. 고화질 화면과 다양한 온라인 학습 기능을 강조했다. 물론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적 홍보를 펼쳤다. 그러나 그 명성과는 달리 결과는 참담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놓친 온라인 교육시장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컨텐츠와 강사였다.

S사는 더 좋은 화면과 기능을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기술적인 면에 집중하고 양질의 컨텐츠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뒷전이었다.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기본 요소, 스타 강사 섭외에도 소극적이었다. S사의 브랜드면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승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S사는 결국 2009년 10월 한 대형 학원에 온라인 교육 사업 분야를 500억원에 매각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2등 기업, 왜 실패했나? 업에 대한 이해와 이에 걸맞는 전략을 세우기 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과신한 것이 문제였다. 기존의 강점만으로는 시장을 먼저 장악하고 있던 강소기업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장에 먼저 진출한 기업은 절대 우위에 있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지만, 후발기업에 자리를 내주고 2등으로 전락한 기업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밀폐용기의 최강자 L사, 2006년 위기를 맞다!
1978년 창립된 L사. 1999년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밀폐 용기를 개발한 이래 밀폐용기 시장을 장악하며 선전해 왔다. 완전 밀폐 용기가 전무하던 시기에 L사만의 밀폐력으로 출시 4년 만인 2003년, 국내 밀폐용기 시장 68%를 점유하며 독보적 존재로 성장했다. 그러나 2006년 환경 호르몬 보도 이후 플라스틱 밀폐용기의 매출은 급감했다.

L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플라스틱의 안정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우선 소재의 안전성에 대해 홍보했고 플라스틱의 무해성 입증을 위한 소송도 불사했다. 새로운 플라스틱 용기를 출시하면서 끝까지 플라스틱으로 승부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소비자 머리 속에 플라스틱은 ‘안전하지 못한 것’으로 자리잡은 후였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불안감을 버리지 못한 소비자들은 안전한 용기를 찾기 시작했다.

2등 기업의 실수 2. 소비자의 변화에 무감각한 태도
L사가 “플라스틱은 안전하다”고 소비자들을 설득하는데 진을 빼는 동안, 소비자의 바램에 부응하는 제품이 등장했다. 바로 유리 밀폐용기. 색과 냄새가 베지 않고 유해성분 걱정 없이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장점이 먹힌데다가 쉽게 깨지는 유리의 단점까지 극복했다. 내열 유리 밀폐용기는 밀폐용기 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플라스틱 일색이던 주방에 유리용기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9년 2000억 원 규모의 국내 밀폐용기 시장의 60%를 유리 밀폐용기가 차지했다. 바로 이 변화의 중심에 글라스락(Glass Lock)이 있다.

글라스락은 L사가 소비자 변화에 무심했던 것과 달리, 소비자의 변화를 읽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 성공한 케이스다. 유리 및 캔 용기 생산업체로 전형적인 B2B 기업이었던 삼광유리공업(삼광 유리 주식회사의 전신). 사실 글라스락을 개발하기 전 위기에 처했었다. 점차 유리병의 쓰임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가 쓰일 다른 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2001년 밀폐용기 시장을 눈 여겨 보았고 유리 밀폐 용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품 개발이 완료된 시점은 2005년. 그간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며 불만을 가졌던 소비자들은 하나 둘 유리 밀폐용기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후 2006년 환경 호르몬 논란이 불거졌다. 안전하고 쓰기 편한 글라스락의 입지는 더욱 돈독해졌다. 글라스락을 통해 B2B에서 B2C로 과감한 전환에 성공한 삼광유리주식회사는 전체 매출의 34.9%를 글라스락에서 올리고 있다.
 
이처럼 선발 주자라도 소비자의 변화에 둔감할 경우, 후발 주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기 쉽다. 같은 실수를 저지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유럽 디지털 셋톱박스(Digital Set-top Box) 시장이 그 예다. 디지털 셋톱박스는 일반 TV에서 디지털 지상파,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변환장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이 장치는 유럽에서 이미 큰 시장을 이루고 있다.  모토롤라,  필립스와 같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시장에 우리나라 강소기업 휴맥스가 뛰어들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바로 소비자의 숨은 욕구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휴맥스가 간파한 숨은 욕구는 무엇일까? 휴맥스가 진출하기 전까지 이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선택권이란 많지 않았다. 방송사나 통신사와 직접 거래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 방송사나 통신사가 정해준 셋톱박스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을 폐쇄형 시장(closed market)이라 부른다. 반면 소규모 방송국이나 개별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방송을 보기 위해 직접 셋톱박스를 구매하는 시장이 있는데 이는 개방형 시장(open market)이라 한다. 이 시장은 1996년 당시 전체 셋톱박스 시장에서 1%를 차지하는 아주 미미한 규모여서 대기업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정말 계륵 같은 시장일까?

아니다. 당시 일반 소비자들의 욕구는 점점 다양해 지고 있었다. 위성 방송의 화질, 채널의 다양화, 품질에 대한 만족 등 니즈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었던 것. 특히 자국의 방송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원하는 유럽 내 이민자들과 이들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규모 케이블 방송사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일괄적으로 대량의 셋톱박스를 공급하는 대기업들은 이런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아니,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휴맥스는 현재보다 시장의 미래를 보고 이 개방형시장에 뛰어들었다. 휴맥스의 선견지명은 대단했다. 개방형시장은 전체 시장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으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휴맥스는 유럽 내에서 5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며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유럽의 셋톱박스 업체들은 말 그대로 ‘물을 먹은 것’이다.

지금까지 막강한 자본과 전문성을 가지고 시장에 진입했지만 업의 핵심을 놓쳐 실패했던 대기업 사례, 그리고 한 때 시장을 만들고 장악했던 선발 주자가 소비자의 변화를 못 읽어 후발주자에 밀린 사례를 살펴보았다.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가인 알 리스는 한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마케팅은 제품의 싸움이 아닌 인식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결국 기업은 기껏해야 6인치 너비(뇌의 크기)를 장악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새로 등장한 기업이건, 기존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기업이건 간에 업과 소비자에 관한 이해 없이는 그들의 인식을 장악할 수 없는 것이다.

<실패에서 배운다> 下편에서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도 이를 유지하지 못해 남 좋은 일만 하는 사례, 뻔한 미투(me too)전략으로 소비자에게 인식되지 못한 사례를 통해 2등 기업이 저지르는 실수를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