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수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어딜까? 일찍이 산업화가 시작됐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국가가 아니다. 바로 일본이다. (표1 참조)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데이터 베이스 조사 기관인 ㈜제국데이터뱅크의 2008년 4월의 조사에 따르면, 동사의 기업 데이터 베이스에 수록되어 있는 약 119만 개 사 중 1912년 이전에 창업한 기업은 2만4234개 사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의 많은 기업들은 전쟁이나 급격한 경기변동의 세월을 거쳤음에도 살아남아 현재까지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장수기업  ‘시니세’
장수기업이란 문자 그대로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기업을 가리키며 일본어로는 ‘시니세(老舗)’라고 한다. 시니세란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의하면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 온 상점 또는 기업’을 말한다. 제국데이터뱅크에서는 ‘창업 후 30년 이상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장수기업의 종업원 규모는 300명 미만이 89.4%로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며, 300~999명은 6.3%, 1000명 이상은 3.7%에 불과하다. 장수기업의 창업 시기는 상공업이 장려된 에도시대(1603~1867)가 25.9%,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메이지 시대(1868~1912)가 67.3%로, 양 시대에 걸쳐 대부분의 기업(93.2%)이 창업되었다. 장수기업의 형태를 보면 식품, 요리, 술, 의약 등 생활 밀착형의 기업, 고유기술로 소재∙부품 등을 생산하는 기업, 다도∙서도 등 전통문화와 밀접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여관 등과 같이 가족단위로 영위할 수 있는 패밀리형 기업 등 크게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의 장수기업들 세계적으로 활약
일본 경제가 태평양 전쟁에 패한 후 빠르게 성장하여, 1980년 대의 엔고와 1990년대의 장기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소재∙부품 등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장수기업의 역할이 컸다. (표2 참조) 이렇듯 일본에 있어서 장수기업은 경제성장 및 고용 안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보다 장수기업이 훨씬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일본 기업을 그토록 오래 살아남게 만드는 걸까?

장수기업의 제 1비결은 ‘신(信)’
㈜제국데이터뱅크가 100년 이상 장수기업 40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장수기업으로써 중시해야만 하는 것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信)’이 1위로 뽑혔다. ‘장수기업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서는 ‘신용’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73.8%로 가장 높았다. 다른 장수기업 조사에서도 거래처 및 고객의 신뢰,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신뢰, 기술력 등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3 참조)

이러한 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수 기업은 신용을 생명처럼 중시함으로써 고객, 거래처, 종업원, 사회 등 이해관계자와 2, 3대 이상의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신용을 중시함에 따라 상대를 속이거나 배반한 행위는 이 사회에서 용서될 수 없으며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다. 장수기업의 신용중시 사상은 일본의 상점, 가게 및 음식점 입구에 걸려 있는 노렌(暖簾, 자신의 상호가 걸려져 있는 무명천)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고객과의 “신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기업의 경영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한편 장수기업은 고객, 소비자, 종업원 등 이해관계자에 대한 신뢰형성을 위해 다음과 같은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장수기업은 고객과 거래처 등에 대한 신뢰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노렌와케(暖簾分け), 장수기업 집중거리 형성, 기업간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노렌와케란 오늘날의 프랜차이즈와 비슷한 형태로, 장기간 근무한 본사의 직원이 본사의 문양이 그려진 노렌을 받아 분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분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렌이란 단순히 회사의 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회사의 신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본사의 명예와 신용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노렌와케는 본사의 신용을 분사기업에 주는 것으로, 분사기업은 본사가 가지고 있는 신용을 공유하여 영업 활동에 이용한다. 그리고 본사와 분사기업은 그 신용을 지키려고 함께 분투하고 내적으로 서로 협력한다.

또한 장수기업은 장수거리 집중거리를 형성하여 경쟁과 협조를 통한 상호 번영을 실현함으로써 거래처 및 고객의 신뢰를 향상시켰다. 단독 생존이 아닌, 주위와의 공생이 장기적 존속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장수기업이 10개사 이상 모여 상점가를 형성하고 있는 거리는 총 42개(기업 수는 793사)에 달한다.

이와 더불어 일본기업은 기업간의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신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즉, 소재기업이 개발한 고기능 소재를 사용하여 부품업체가 고품질∙저가격의 부품을 만들고, 완성품 기업은 그 부품을 사용하여 만든 신제품을 시장에 내 놓는 시스템이 확립됐다. 이러한 완성품 생산기업과 소재 및 부품기업간의 장기적 협력관계는 기업의 장수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일본 자동차 생산업계의 내재율(자사에서 부품을 생산하는 비율)은 30% 정도다. 나머지 70%는 부품업체로부터 부품을 조달하고 신기술의 개발 등도 부품업체에 의뢰하고 있다. 무라카미카이메이도(村上開明堂, 1882년 창업)라는 장수기업은 원래 경대를 제조하던 업체다. 그러나 거울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킨 결과, 휴대폰의 액정화면을 제작하게 됐다. 더 나아가 물방울이 맺히지 않는 자동차 백미러를 개발하여 도요타자동차에 백미러의 60%를 공급하고 있다.

인재가 절대적이라는 믿음
장수기업들은 종업원과의 신뢰형성을 위해 인간중시 경영을 실시하고 있다. 기계보다는 종업원에 체화된 기술이나 노하우를 중시한다. 그리고 그 노하우의 기초가 되는 인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인간중시 경영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장수기업은 오랜 경영 경험을 통해 예기치 못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기업 체력의 원천은 기업에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인데, 이는 사람이 담당하고 있음을 체득했다. 그래서 일본기업들은 장기불황 등 경영여건이 악화되더라도 획일적인 인원 감축이 아니라 오히려 고용의 장기화를 유지하는 등 인간 관계 강화를 중시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회사로 평가 받고 있는 도요타자동차(1938년 창업)가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우수한 제품을 만들려면 우선 사람을 육성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경영자에게 깊이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인재를 장기적으로 육성하고 있으며 종업원의 건강도 배려하고 있다.

지역사회와의 신뢰 형성
또한 장수기업은 지역사회에 대한 신뢰기반 형성을 위해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투자하거나 지
역주민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있다. 우베흥산(宇部興産, 1897년 창업)과 DOWA홀딩스(1884년 창업)는 경영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우베흥산은 지역에 종합병원을 세우고 지역발전을 위해 고속도로 건설 등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 결과, 장기불황으로 기업이 위기를 맞았을 때 지역주민들이 주식을 대량 매입하여 경영 정상화에 이바지할 정도의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DOWA홀딩스의 경우,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른 급격한 엔고로 경영여건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을 지속적으로 고용했다. 이후 이 지역에 일본 최대의 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할 때도 지역주민들이 호응할 정도로 신뢰를 구축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수기업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最古)의 장수기업도 보유하고 있는 장수기업 대국이다. 타국가와 달리 월등히 많은 장수기업을 보유하게 된 이유로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지만, 그 중 고객, 거래처, 종업원, 지역사회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들과의 신뢰형성이 핵심요인으로 작용했다. 최근 노사갈등, 멜라민 파문 등 고객과 기업, 고객과 종업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일본 장수기업의 믿음은 경영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