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대 김준기 회장(왼쪽)과 4대 김정선 사장

지난 2012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보진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회사다. 1912년 서울 종로에서 처음으로 인쇄기를 돌리기 시작한 이래 100년의 세월 동안 한우물만 파며 꿋꿋이 제자리를 지켜왔다.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세워진 인쇄소로 지난 100년간 해방과 6·25, 70년대와 80년대에 걸친 산업 성장 시기,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모두 거쳐 온 만큼 보진재의 역사가 곧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그간 무수한 인쇄 업체가 문을 닫았지만, 최고(最古)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대한민국의 세월을 켜켜이 찍어냈다.

‘안분지족’ 이념으로 4대째 경영
무엇보다 김진환 창업주에 이어 2대 김낙훈, 3대 김준기, 그리고 오늘날 4대 김정선 사장에 이르기까지 4대 승계의 과정을 통해 그만의 장인정신을 지켜온 점은 가업을 잇는 수많은 기업들에게 좋은 표본이 돼준다. 역사의 시련을 함구한 채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며 장인정신의 혼을 끝끝내 지켜왔다.

인쇄업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보진재는 서화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김진환 선생의 창업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진환 창업주는 대한제국 학부에서 교관으로 10년간 교과서 발간 업무를 담당하다 일제 침략으로 망국의 아픔을 겪은 뒤 공직을 떠나 인쇄소를 개업했다. 서화의 재능을 살려 석판 인쇄술을 익힌 후, 수동 석판 인쇄기 3대를 들고 1912년 8월15일 ‘(주)보진재석판인쇄소’를 개업했다.

설립 초기 졸업증서, 학적부, 성적고사표 등을 비롯해 책의 표지를 주로 작업했으며, 창업주 김진환 선생은 망국의 길을 걷는 와중에도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민족성에 위배되는 일은 단호히 배제했다. 아무리 주문량이 많아도 민족성에 상처를 내는 인쇄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듯 민족정신에 기초한 보진재의 정도경영은 100년을 관통하는 경영 이념으로 오롯이 자리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경영 이념으로 내걸고, 검소와 절제를 통한 선비의 자세를 지향해온 보진재의 리더들. 편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의 안분지족 정신은 후대 리더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된다.

파주 출판단지서 ‘제2의 도약’
1992년 김정선 4대 사장이 취임 후 보진재는 제2의 도약이 시작된다. 1996년 코스닥에 상장 후, 2002년에는 파주 출판단지로 공장 및 사옥을 이전,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업무 환경을 마련한다. 파주 출판단지 입주 1호 기업으로 김 사장은 입주기업 협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확보된 4300평은 업무의 효율을 높여줬다. 1층에는 인쇄에 필요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고, 2층은 사무실 및 제판 시설로 사용한다. 업무의 효율만이 아니다. 파주로 이전한 후에는 일종의 잊고 있던 최고 인쇄업체로서의 긍지를 느끼기도 했다.

사실 4대 김정선 사장은 처음부터 승계 의지를 품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도 컴퓨터를 전공하고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 전산실에서 전산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다. 인쇄업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 선택한 길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40세에 가업을 이어받게 된다.

안분지족의 정신은 김정선 사장에게도 고스란히 자리했다. 현재 보진재는 전체 작업 물량 중 하나의 거래처가 차지하는 비중을 5%가 넘지 않도록 조율하고 있다.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몇몇 클라이언트에게 집중을 하다 보면 해당 업체와 보진재 모두 상호 의존도가 높아진다. 이 상태에서 주문이 끊기거나 작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 양사 모두에게 상당한 리스크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거래처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김 사장은 “업체가 떨어져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한 곳과 많은 물량을 거래하면 수익은 높아지겠지만, 그건 욕심일 뿐이죠. 차라리 100개, 200개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두고 안전하게 거래하 는 게 낫습니다”고 말한다.

현재 인쇄업은 경쟁 포화상태다. 인쇄 산업 전체도 점차 쇠퇴의 길을 걷는 게 사실이다. 인쇄 단가는 오르지 않고, 전자책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출판업계 자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책의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있고, 이를 다루는 인쇄기술의 디지털화도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진재는 100년을 견뎌낸 안분지족의 정신으로 희망의 미래를 꿈꿔본다. 지금 김정선 사장은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대응할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는 중이다. 미래지향적인 그 열정이 5대로 6대로 멈춤 없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